천주교/천주교회

송해봉

공기돌 바오로 2008. 8. 24. 15:46


 

공기돌 이야기

 

청년 송해붕 세례자 요한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그는 1926년 경기도 부천구 계양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계산 초등학교, 인천 기계 공고를 거쳐 44년 4월 덕원신학교를 편입하여 신학생 생활을 하던 중 45년 해방 이후 사제가 되기 위한 학업 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계양구 귤현동, 고촌 은행정 마을(현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은행정)로 들어가 야학을 운영하며 전교 활동을 벌입니다.

이후 몇 년 간 은행정과 누산리 공소(현 김포시 양촌면 누산리)를 오가며 펼친 전교 활동은 가히 성인의 수준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열정과 수고는 가는 곳마다 청년이고 어른이고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변화시겼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내 별명은 공기돌이야. 공기돌이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 아쉬운 때 갖고 놀고 싶은 만큼 갖고 놀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라는 의미지, 여러분은 이제부터 공기돌 놀이하듯 나와 함께 신나게 공부해 보자."
이렇게 해서 청년 송해붕을 공기돌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사람들에게 버려진 공기돌이 될 때 하느님께서 진주로 여겨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거나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뽑아 교리와 병행하여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명쾌하고 재미있고 엄했던지 당시의 제자로서 지금 생존하는 이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년 송해붕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천주교가 동네에 전파되는 데 반감을 가진 주민 일가의 밀고로 빨갱이로 몰려 총살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은 신앙 전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순교였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과 함께 묻혔으나 그의 십자가와 새까만 주단과 묵주가 썩지 않아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시체와 함께 있던 널판지에는 장미 넝쿨이 우거져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이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계양산에 묻혔다가 김포 성단 묘지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청년 송해붕 세례자 요한은 평소 세례자 요한처럼 살다가 순교하기를 소원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선교 열정을 못다 쏟아냈던 고촌 공소에는 인촌교구 고촌 성당이 들어섰고 그가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던 누산리 공소에는 인천교구 사목연구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성인의 반열에서 오늘도 살아 활약하고 계십니다.

위의 공기돌이 전하는 말은 그가 괘도에 적어 교우들에게 반복 주지시켰던 일종의 생활 지침입니다. 당신께서 천천히 읽으면서 그 깊은 뜻과 그 강렬한 분발심과 그 큰 안목에 심취하기를 바랍니다.

송해붕 세례자 요한, 그는 한 개인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신께서 "그가 교회였고, 그가 교회를 세우는 또 다른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