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천주교회

대림절의 기도

공기돌 바오로 2012. 12. 5. 11:35

 

♧ 대림절의 기도 ♧

                  **대림절의 기도 **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세주를 약속하신 야훼여,
오늘 또 다시 부르짖는 우리를 굽어보아 주소서.
애타게 빛을 기다리는 암흑 속의 인류에게 희망을 주소서.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한 분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빛을 받았으나 번번이 외면하고, 거절하고,
무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다 생생이 보게 해 주십시오.
무디어진 양심에 날을 세우게 하시고
굳게 닫은 마음의 문을 열게 하소서.
야훼여! 내 말씀을 들으십니까?
나 자신이 갇히어 아무 것도 못보고 아무 것도 못 듣습니다.
나 위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기쁨은 어디에나 있고, 희망도 언제나 있지만
그것은 타인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를 열지 않기에 아무도 나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에게 오는 무수한 아픔도 혼자서 겪습니다.
야훼여! 내가 갇힌 이 감옥 문을 부숴 주십시오.
기쁨과 빛이 가득한 길을 열어 주십시오.

-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뜨락의 기도』에서 -
Jang.H.S. 바오로 ( 공기돌 Jang.h.s. 카페.)

☆ 대림시기 ; 초 네개의 의미 ☆

초 하나는 천년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4천년을 의미해서 네개를 켠다.

대림초는
대림 1주에 보라색 초를 켜는 것으로 시작으로
연보라색(제2주),
분홍색(제3주),
흰색(제4주),순서로 한주에 하나씩 늘려가며 밝혀준다.

첫째주는 세상 종말에 대한 준비와 경고를,
둘째주는 세례자 요한의 구세주 오심에 대한 속죄와 권유
셋째주는 구세주 탄생의 임박함에 대한 준비와 기쁨을,
넷째주는 성모마리아의 넘치는 기쁨을 상징한다.

대림환(待臨環):
대림시기 동안 푸른 나뭇가지와
네 개의 초로써 대림환을 만들어
구세주께서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셨는지 알려주며,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 켠다.

** 대림환에 불을 켜며 드리는 매일 기도 **
대림 제1주간
오 임마누엘, 예수그리스도모든 민족의 소망이시며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시여
우리 가운데 오시어 거하소서

대림 제2주간
모든 민족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의 참 기쁨이시여
당신의 사람들에게 오시어 구원하소서

대림 제3주간
다윗의 열쇠 예수 그리스도,
하늘 문을 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소서.

대림 제4주간
지혜이시며,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 만물을 손에 품고 계신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소서.

〈 우리의 생활 〉
우리는 대림시기에 우리 존재 전체가 주님께 향하도록
기도와 선행[자선]과 극기를 하면서
성사의 의미를 다시 인식하고
주님께서 우리 생활 속에 오시기를 기다려야 하겠다.

구세주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 박 정 희 대 통 령 의 눈 물 ★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생도 교육에 사용해 그동안 
‘육사교장의 편지’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 작성자는 예비역 장성인 김유복(金遺腹·79)씨. 
그가 로터리코리아(한국로터리의 기관지)에 기고한 글이다.
지금은 60~70대 이지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

“60대를 수구 꼴통이라 몰아붙이는 젊은이들이여! 이 글을 읽어 보렴”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6,7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6,7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였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6,7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 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독재를 했기에 지금까지 여러 국민들 한테 욕을 먹고 계시는 양반이다.. 나도 뭐 독재는 욕 먹어 마땅하다고 본다.

허나 어느 시대든 그 시대에 맞는 정치가 있다고 본다. 세계 최빈민국 시절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와 실력있는 참모진 그리고 성실히 일하는 국민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없었다고 본다.

독재는 욕 먹어 마땅하나 좀 더 넓은 시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기를 바란다.

난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중도를 지킨다는 허울에 휩싸인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들만큼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존재도 없다고 본다.

골프맨 올림

 


 

 

 

 

 

중국에는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 것

 

 

    중국에는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공칠과삼(功七過三)'의 문화다.

    등소평(鄧小平)이 모택동(毛澤東)의 행적을 평가하면서

    그의 공(功)이 일곱 가지이고 과(過)가 세 가지인데,

    공이 과보다 크기 때문에 그를 중국 근현대사의

    최고지도자로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인생만사에 공과 득(得)과 실(失) 미(美)와 추(醜)의

    상반된 면이 공존한다는 만물의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통치체제는 안정되고 사회와

    경제가 그 바탕 위에서 큰 흔들림 없이 발전하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삼협대학이 주최한 세계총장협의회에서

    24개국 총장들이 환담하는 자리에서 주고받은 이 말이

    특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우리에게 지금 혼란이

    지속되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KBS 특집방송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방영됐다.
    이승만 박사에게도 공과 과가 있다.

 

   

    그는 우뚝 선 항일투쟁가였고 건국대통령이었으며

    건국 이후의 혼란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웠다.
    물론 6·25전쟁 때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남하한 일,

    개헌 등 독재정권으로 흐른 것 등 과도 있다.

    하지만 인물로는 그만한 경력과 학식,

    외교력과 지도력을 갖춘 이는 드물다.

     그런데도 하와이 망명 이후 공은

    다 잊히고 과만 지적될 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풍요를 누리고

    예체능이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바탕이

    1960~70년대의 경제발전에 있는 것 아닌가.
    박 전 대통령에게도 물론 과가 있다.

 

    유신체제로 정권을 유지하려던 독재는 잘못이다.
    그렇지만 박 전 대통령 역시 남긴 공이 과보다 훨씬 많다.

   

    지금 우리에게는 숭배할 만한 스승과 지도자가 없다.
    존경할 만한 대통령, 어린이들이 배우고

    마음으로 새길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선진국에 가면 국민 모두가 받드는 인물들의

    동상이 여기저기 서 있고 책에서도 배운다.

    그들의 과(過)도 기억되나, 공(功)을 더 사서 기린다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만 부각시켜 폄훼하고 파괴한다.
    이승만·박정희 두 전 대통령에게는 '건국대통령'

     '경제대통령'이란 이름이 걸맞다.
    다 같이 독재한 과가 만년(晩年)에

    있었지만 공이 더 크고 남는다.

    민주화에 큰 공이 있는 분에게는 '민주대통령',

    선진화에 큰 공이 있는 분에게는 '선진화대통령' 등

    이름을 붙여 기념관을 세우고 동상을 건립해 나라의

    지도자로 모시면 나라의 안녕과 번영에 얼마나 큰 힘이 될까.
    그런데 얼마 전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는데

    정부 관계자는 한 사람도 가지 않았고,

    박정희 기념관은 서울 외곽에 만들어졌다.

 

    사회와 경제가 커지고 복잡해지면 정치든

    정책이든 회색지대가 늘고 이익이

    상충되는 부분이 커지기 마련이다. 국방에도,

    지역에도, 교육에도, 과학기술에도 좋고

    나쁜 것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한 면만 버리거나

    편애하면 반대편의 반감과 반동이 생기고

    거기서 끊임없는 분규와 투쟁이 생긴다.

    그러면 중용(中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이야말로 '공칠과삼(功七過三)'의

    정신과 이에 바탕한 정책선택이 꼭 필요하다.

       극한투쟁으로 점철된 한국의 정치도 이제 조금

    더 성숙한 관용과 배려, 한층 차원 높은 대도(大道)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닌가?

 

 

 

 

+모빌랜드 강남멋장이 여의도사랑+

 

 


 

 

우리 영토 대마도를 찾자

우리 영토 대마도 (對馬島)를 찾자

대마도가 한국땅/이승만전대통령,日에 수십차례 요구 -

일본, 대마도가 조선 땅이란 공식 지도문서를 의도적으로 은폐

 

미국과 협상에서 국제공인지도로 활용,미국-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 땅"으로되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한 발언 중

 

‘오래된 해상경계“는 어디일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즉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사진의 지도는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지도는 대마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

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김 대령은 “이 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해설서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

고 강조했다.김 대령은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은 “한-. 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현해탄

(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주; (윤정우 씀)

 

포럼후에 대마도반환추진국민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박수가 나왔습니다.

 

또한, 일본교과서에 1930년경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땅임을색칠한 지도가 있다는것을 보여 주는

노신사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김대령은 6.25전쟁이 터지자, 이승만대통령은 우선 소련 공산당을

무찌를 때까지일본에 대한 반환요구를 잠시 참자는 발언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상세한 포럼내용이 추가 보도 될것으로 봅니다.

최종편집 2011.05.11 18:48:52......

온종림 기자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에 수십차례 요구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를 반환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거리상으로도 우리나라가 훨씬 더 가까운 대마도는

옛날부터 조선인들이 더 많이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대마도

 

 

그때 그시절 

'8.10 독도의 기적'!

 

58년전 8월10일,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 등대 점등식을 세계에 공개했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 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사진은 증축된 현재의 모습, 갈매기들이 아름답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사진은 증축된 현재의 모습, 갈매기들이 아름답다

 

 

이번에도 8월 10일!

같은 날에 같은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나.

58년전 바로 이날은 ‘독도는 우리땅’임을 세계에 알린 날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깜짝 방문’한 이날,

이승만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올해는 ‘평화선’을 선포한지 꼭 60주년!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포함한 영해를

‘평화선’으로 선포(1952년 1월18일)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대마도를 도둑질했던 수법으로 진작 독도를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1954년 7월30일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부가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부부 및 그 손자들과 공식사진을 찍었다.

 

1954년 7월30일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부가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부부 및 그 손자들과 공식사진을 찍었다.

 

 

이승만은 독도의 등대점등식을

왜 하필 방미 기간에 하라고 지시했던가.

 

1954년은 6.25남침전쟁이 휴전(1953년7월27일)한 일년 후.

미국은 한일우호관계 회복을 극동정책의 핵심으로 삼고

이승만 대통령을 공식 초청한다.

국제공산주의를 내세워 동유럽과 중국 대륙, 한반도 절반을 차지한

소련의 신식민주의 패권을 뒤늦게 깨달은 미국.

냉전시대가 본격화되자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켜야만 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독립운동과 건국준비 때부터

줄곧 미국의 ‘좌우합작’ 압력 등을 거부해온 불굴의 지도자가 아닌가.

게다가 전쟁중에도 일본을 집중 지원하는 미국이 싫었다.

전쟁물자 공급을 도맡은 일본은 패전 10년도 안되어 일약 떼부자가 되다니.

그것도 한국을 강점했던 범죄자가 한국전쟁을 이용해 경제부흥을!

“이게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야?

정상회담 필요없다.

백악관에 안간다.”

1954년 7월30일 오전 10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2차 회담이 끝나게 되면 발표할 공동성명 문안을 보자

이승만은 분노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우호적이고...운운’하는

대목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들이 날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이러면 아이크 만나지 않겠다.”

백악관의 독촉과 측근들의 건의에 마지못한 듯

이승만은 뒤늦게 아이크(아이젠하워)와 마주 앉았다.

아이크는 한일국교수립이 시급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사전에 일본과 합의한 뒤였다.

“이대로는 안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 안하겠다.”

이승만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놀란 아이크는 화를 내며 옆방으로 가버렸다.

진작부터 화났던 이승만이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회담은 결렬 직전.

화를 삭인 아이크가 다시 회담장으로 나왔다.

이번엔 이승만이 벌떡 일어섰다.

“먼저 간다. 외신기자클럽 연설 준비 때문에...” 

백악관을 나와 버렸다.


 

1954년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겁쟁이들이 하나님이 다 차려준 밥상을 걷어찼다.

한반도 통일전쟁은 이제부터다.”

마중 나왔던 닉슨 부통령의 얼굴이 벌개졌다.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 연설은 미국정부와 미국민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는 현명치 못한 사람들의 휴전으로 헛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자유인들이 살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면, 자유세계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바보같은 휴전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친구들이어,

공산주의를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마시오.

치명적인 바이러스입니다.

퇴치 투쟁에 나서야만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 주장이 강경합니까?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직한 세력입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합시다!”

휴전을 결사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했던 이승만은

‘성스러운 통일전쟁’을 즉시 다시 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매카시 의원의 공산당 고발로 반공분위기가 고조되어있던

당시 미국회의원들은 33차례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소련 간첩으로 체포된 미국무성 실세 알저 히스(루즈벨트 대통령 측근)가

유죄판결을 받은 직후이기도 했다.


 

미국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연설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미국회의원들.

 

미국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연설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미국회의원들.

 


이튿날 이승만은 미리 준비한대로

판문점의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철수’와 ‘휴전협정 백지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직접 발표했다.

 

언론들은 바빴다.

'외교의 달인' 이승만 특유의 현장 외교 전술은 눈부실 정도였다.

 

양국에서 동시 발표된 한미정상간의 공동성명서에는

‘한일관계’에 대한 단어가 한 개도 없었다.
한국이 미국에 요청한 군사-경제원조 7억달라도 물론 합의되었다.


 

1954년 8월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퍼레이드'를 벌이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8월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퍼레이드'를 벌이는 이승만 대통령.

 

 

그때, 일본의 '독도 장난'이 있었다.

뉴욕타임즈(7월31일자)에 ‘다케시마를 한국이 점령,

일본 주장’이란 제목이 붙은 기사가 2개면에 걸쳐 실렸다.

이승만도 이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100만인파의 환호속에

‘영웅 퍼레이드’를 벌인 이승만은

마지막 기착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측근에게 지시했다.

“준비는 끝났는가. 등대에 불을 켜라.”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1948년 건국과 동시에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수십차례 요구했던 이승만.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물거품 되자

일본이 탐내는 독도에

등대를 건설하고 점등식을 준비해 왔던 이승만의 빅카드.

 

한일관계 회복을 밀어붙이는 미국에게 보란듯이

미국 방문 중에 ‘독도는 한국땅’임을 선포하는

‘깜짝 외교 쇼’를 벌였던 것이다.

 

국토방위는 전쟁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통치자의 의지와 국민의 애국심이 등대불로 불타야 하는 것!

 

우연의 일치일까.

58년 시차를 둔 같은 날 두 대통령의 독도 지키기!
이승만과 이명박의 ‘8.10 역사 이벤트’!!

독도 이력서에 5천만 소유주의 지워지지 않을 인증이 또 찍혔다.

 

선대가 물려준 영토를 지키는 것은

 ‘국가보위’ 첫 째 의무다.
그 소중한 우리 땅 독도 앞바다를 일본에게

‘공동수역’으로 열어 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에 무슨 책 잡힌 것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뜬 금 없이 일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다니...

나라 땅을 적에게 내주는 ‘친일파’는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령' 글자를 만지고 있다.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령' 글자를 만지고 있다.

 

인보길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MB식 克日스타일! 8월의 승전보!

이승만이 지킨 독도, DJ가 日에 양보!

이승만 '평화선'-박정희 '전관수역'->김대중 '어업협정'서 바다 내줘

 

2012년 8월 10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아주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현직대통령으로서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자기나라 땅에 간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십 수 년 전부터 집요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강대국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직대통령들이 껄끄럽게 여겼거나 작전상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독도를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제 36년간 한반도를 지배하다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쫒겨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떳떳하게 주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대중정부 때 체결한 소위 신한일어업협정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1952년 1월 18일,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

즉 이승만 라인에서도 독도는 우리 영토임을 만천하에 공포했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된 한일 어업협정에서도

독도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어업수역)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9월 25일 소위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중간수역(공동관리수역)으로 빼버리고 나면서,

일본은 이를 계기로 끈질기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독도영유권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떼나 써보는 정도였었습니다.

하지만 독도가 중간수역 즉 한일 공동관리수역으로 빠져나가자

법적인 논리적인 근거가 생겼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더니만 8년 전 부터는

일본 국방백서에 아예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명기를 해놨다고 하니,

오늘날 독도 영유권 문제는 김대중전대통령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의 전직 대통령이

잘못 저지른 일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였기에

이대통령이 직접 팔 걷어부치고 독도를 전격 방문하여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만천하에 각인 시켰습니다.

 

현정부에서 하는 일이면 무조건 반대부터하고 비난하는 이들은

긁어부스럼 만들었다며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사법재판을 받게 하려는데 일조했다거나

대일본 카드를 다 써버렸다며 비난을 일삼습니다.

 

도대체 저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대북 이슈에서는 북한 편들고,

대일 이슈에서는 일본 편을 들어주니

어느 나라 국민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토문제에서는 단호한 입장이 필요합니다.

다른 나라가 영토를 침탈하겠다는데도 그냥 기회나 엿보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불리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나 하고 앉아 있어서는,

영토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도 대한민국 영토라는 역사적 기록물들이

전 세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전쟁이나 물리력으로 영토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법입니다.

패망한 일본이 독도도 되돌려주는 것이 합당하고,

1998년까지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해방후부터만 치더라도 70여 년 간 실효적 지배를 해왔는데

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불리하다고 지레 짐작, 겁부터 먹어왔었는지

지금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국민정서와는 다르게 독도 문제에 대처해 온 것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세계 2위였던 경제대국 일본하고 독도 영유권 가지고

분쟁하다가 지게 되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까봐서 겁을 먹고

이러저러 핑계를 대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에 반해 이대통령은 단호하게 영토수호 의지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이런 정도의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수 십 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겨워 하던 차에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해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함을 온 국민들이 느꼈습니다.

 

그동안 역대 정권들은 반일감정만 앞세워왔었지

시원한 대응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반일(反日)이 아닌 극일(克日)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여준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광철 시민 논설위원

 



 

그런데 한심한 일이 벌어 졌다.

대통령 하겠다는 분들에게 기자가 대통령 당선되면

독도에 갈것이냐고 물었더니..

박근혜후보와 김두관후보는 간다고 했고

한분은 대통령 출마도 아리송한데 역시나 이것도 아리송이고

나머지 대통령 하겠다고 서로 내가 적임자라고 잘난체 하시는 분들은

즉답을 피했다고 하는데...그분들 어디나라 사시는 분들인가요?

위의 글좀 읽어 보시지요.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이호연) 

                                                    "우리가락 감상하세요"

                                http://www.youtube.com/v/Ae2oM9C-h3A?fs=1&hl=k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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