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장씨

안동장씨

공기돌 바오로 2006. 3. 18. 07:15
시조태사충헌공 영정

안동장씨의 시조 (安東張氏의 始祖)

始祖의 초휘는 길 (吉)이요 후에 다른나라에서 쓰던 이

 

름으로 공을 높이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정필(貞弼)이라 개명 하였다.

관직은 통합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統合三韓壁上三

 

重大匡亞父公信) 태사(太師) 충헌공(忠獻公)이시다.

 

시조께서는 888년 당나라에서 태어나 892년 아버지
원(源)께서 당말(唐末)의 병난을 피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신라로 올 때 다섯 살의 어린이였다. 처음

배를 대고 상륙 한 곳이 명주 현강능이다(경포호반(鏡浦湖畔)
에 당시 기착했던 곳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음).
왜 서해안이나 남해안을 택하지 않았으나?
 892년 견훤(甄萱)

은 완산주에 응거 하면서 후백제라 선언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남쪽의 무진주 청주(진주)까지 침략 하게
되니 그 지역은 정착하기가 불안했던 곳이다. 당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동해로 올라가 명주를 택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내륙으로 더 들어와 충주(중원소경) 지역에서 정창한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족보에 시조의 아버지 원(源)의 묘가

원주에 있는 것이 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공이 18살이 되어
오랫동안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던 꿈이 이뤄지니 당나라로
가는 사신을 따라 당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에는 일가가

있어 힘써 공부하기 좋았다. 24세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높은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 수천을 길러내니 사람들은 당대의 부자(夫子)라 일컬었다.

이 소문은 곧 황제의 귀에도 들리고 황제는 여러 번 禮를 다해
청함으로 더 사양할 수 없어 관직에 올라 전란으로 소실된 학교를
재건하고 성균관을 창건하여 관혼상제의 예를 성현의 법으로

따르도록 하고 이부상서의 높은 지위에 오르더니 간신 김남석의
무고가 있으니 신라로 환국 하였다.
이때는 태봉의 궁예가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홍유,배원경,신숭겸,복지겸의 어릴 때 이름)
등의 배반으로 죽고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2년이 되던 해이다.


그 후 공께서는 고창 (古昌)으로 내려가 성주 김선평공과 영장
김행공과 두터운 교분으로 형제같이 惻뻥척醮?견훤이 그 세를
더하여 927년에 공산 상주 대목군 고을부등을 점령하고 929년

12월 파죽지세로 순주를 항복시키고 고창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고려왕건 태조가 내려와 견훤군과 대전하니 삼공께서
그간 훈련하고 양병했던 관군과 창의군 사병을 모아 태조를

도와 크게 승리하니 이른바 930년 1월 병산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오랜만에 승리하고 견훤이 패하니 후백제의
파멸의 동기가 되었다.
태조께서 삼공의 공을 높여 김선평에게

대광 (大匡)을 장길과 김행(권행)에게는 대상(大相)의 벼슬을
내리고 고창을 승격하여 안동부로 하고 안동을 삼공의 식읍으로
주었다.
태조는 김행을 권씨로 사성 (賜性)하고 삼태사와 같이

안동을 본관으로 삼으니 이로써 안동장씨와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가 생겨났다.
시조께서는 그 후 오랫동안 고려 왕실을 도와

공을 세우고 연세가 많아 환로 (宦路)에서 물러나 안동에서 수백
제자를 기르시다 91로 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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