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장씨

우리의족보

공기돌 바오로 2008. 5. 1. 23:34

족 보(族譜)

족보는 고대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집안의 족보가 기록으로 전해오니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체로 고려중엽 이후로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임경소(任景蕭)의 선원록(璿源錄)이 그 효시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왕실의 친척인 宗子와 宗女까지 기록하여 족보의 형태를 갖추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의 계보를 기록하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

 

 1334년 (우왕14년)에 종문역사를 정리하여 王씨, 車씨, 柳씨 세성이 보판(譜版)을 새기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서울 대학교 한국사 교수인 한우근 교수와 이태진 교수 등이 編著한 韓國 文化史의 조선 전기 편에서도 현재 까지 밝혀진 바로는 고려 말엽의 해주 보광사에 보관되었다는 연안차씨 족보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이의 노출을 꺼리든 몰지각한 인간들에 의해 훼손되어 단 1항만 전해오니 안타까울 뿐이다. 고려말 성리학의 도입은 모든 부분에서 계통을 중시하는 學風이 불어 이 역시 族譜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보는 1423년 (세종5년)에 문화유씨 영락보인데 서문만 전할뿐 현존하지는 않는다. 1476년 (성종7년)발간된 서거정의 찬(撰)으로 되어있는 안동권씨 성화보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휘귀고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565년(명종20년)에 문화유씨 가정보가 혈족 전부를 망라 하여 간행되면서 남녀 모두를 기재 하고 남(男)은 자(子)로, 사위는 여(女)로 기록하고 심지어 개가한 여자의 경우 전 남편을 여(女)로 개가 후의 남편을 후부로 기재하여 자손 모두를 기재 하는 변화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사림의 등장으로 인해 족보에도 많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시조(始祖)의 유래를 기원전 우리나라에 왔다고 중국의 인물을 고증 없이 자기의 조상이라 꾸미어 족보를 간행 하는 일들 이다. 이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 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신분상의 많은 변화가 족보에도 불어 다쳐 이후에 족보들은 자료의 고증이나 검토 없이 자의 적으로 기록하고 간행된 것이 많았다.

조상을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과장 하고 명문의 족보를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 결과 17세기 이 후 여러 가문에서 족보가 발간되고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안동장씨도 그 무렵부터 여러 지파별로 족보를 발행 하고 1832년에 志(덧말:지)洪(덧말:홍)씨가 주관해서신묘보를 발행함으로 여러 파가 모아져 족보 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지역 지파에서 족보를 발행 하여 전해오고 있으나 교통이 불편 하든 그 시대에 전국에 산재해 있는 전체 안동 장씨의 후손이 하나로 동참 하기란 한계가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교통과 통신이 발전한 2001년에야 비로서 안동장씨들의 숙원이던 안동장씨대동보를(10권1질) 안동장씨대종회가 발행함으로 그 뜻이 이루어 졌다고 하겠으나 남북의 분단으로 북한에 거주 하는 많은 종친들을 등재(登載)할 수 없었고 또한 분별없이 인동장씨로 옮겨간 지파와 자손들이回歸(덧말:회귀)하지 않았으며 계통을 이미 상실하고 지각이 부족한 자손이 누락(漏落)된 점은 옥에 티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명문(名門)의 씨족(氏族)이요 자손(子孫)이다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우신 태사 충헌공의 후손이다

 

 이 나라가 오늘이 있도록 우리의 조상들의 공헌(貢獻)이 지대하지 않았는가. 숭조(崇祖) 하고 애족(愛族)하고 충성(忠誠) 전가(傳家)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조 충헌공의 운잉(雲仍)들이여 긍지(矜持)를 가지고 자존(自存)번영(繁榮) 합시다. 아래에 안동장씨들의 족보 발행 목록을 게재(揭載)함으로 연구의 재료가 되길 바랍니다. 글쓴이 34세 張東權 (참고한 문헌 차덕경씨의 고려시대 족보의 논단에서)

 시 조 태 사 충 헌 공  영 정

 

始祖의 초휘는 길 (吉)이요

후에 다른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을 높이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정필(貞弼)이라 개명 하였다.

 

관직은 통합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

(統合三韓壁上三 重大匡亞父公信)

태사(太師) 충헌공(忠獻公)이시다.

시조께서는 888년 당나라에서 태어나 892년 아버지 원(源)께서 당말(唐末)의 병난을 피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신라로 올 때 다섯 살의 어린이였다. 처음 배를 대고 상륙 한 곳이 명주 현강능이다(경포호반(鏡浦湖畔)에 당시 기착했던 곳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음). 왜 서해안이나 남해안을 택하지 않았나? 892년 견훤(甄萱)은 완산주에 응거 하면서 후백제라 선언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남쪽의 무진주 청주(진주)까지 침략 하게 되니 그 지역은 정착하기가 불안했던 곳이다. 당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동해로 올라가 명주를 택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내륙으로 더 들어와 충주(중원소경) 지역에서 정창한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족보에 시조의 아버지 원(源)의 묘가 원주에 있는 것이 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공이 18살이 되어 오랫동안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던 꿈이 이뤄지니 당나라로 가는 사신을 따라 당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에는 일가가 있어 힘써 공부하기 좋았다. 24세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높은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 수천을 길러내니 사람들은 당대의 부자(夫子)라 일컬었다. 이 소문은 곧 황제의 귀에도 들리고 황제는 여러 번 禮를 다해 청함으로 더 사양할 수 없어 관직에 올라 전란으로 소실된 학교를 재건하고 성균관을 창건하여 관혼상제의 예를 성현의 법으로 따르도록 하고 이부상서의 높은 지위에 오르더니 간신 김남석의 무고가 있으니 신라로 환국 하였다.

이때는 태봉의 궁예가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홍유,배원경,신숭겸,복지겸의 어릴 때 이름)등의 배반으로 죽고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2년이 되던 해이다.
그 후 공께서는 고창 (古昌)으로 내려가 성주 김선평공과 영장 김행공과 두터운 교분으로 형제같이 지내시더니 견훤이 그 세를 더하여 927년에 공산 상주 대목군 고을부등을 점령하고 929년 12월 파죽지세로 순주를 항복시키고 고창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고려왕건 태조가 내려와 견훤군과 대전하니 삼공께서 그간 훈련하고 양병했던 관군과 창의군 사병을 모아 태조를 도와 크게 승리하니 이른바 930년 1월 병산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오랜만에 승리하고 견훤이 패하니 후백제의 파멸의 동기가 되었다.

태조께서 삼공의 공을 높여 김선평에게 대광 (大匡)을 장길과 김행(권행)에게는 대상(大相)의 벼슬을 내리고 고창을 승격하여 안동부로 하고 안동을 삼공의 식읍으로 주었다.

태조는 김행을 권씨로 사성 (賜性)하고 삼태사와 같이 안동을 본관으로 삼으니 이로써 안동장씨와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가 생겨났다.

시조께서는 그 후 오랫동안 고려 왕실을 도와 공을 세우고 연세가 많아 환로 (宦路)에서 물러나 안동에서 수백 제자를 기르시다 91로 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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