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북한군 불법 남침.

공기돌 바오로 2010. 6. 25. 08:14

      6.25 사변 [5507 설채은]| ♥ 과제학습 ♥

      설채은(학습부장) 조회 28 | 10.06.11 21:15
      http://cafe.daum.net/jhy1507/5sSn/520
      육이오 (六二五)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군이 불법 남침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 6·25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

      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
      를 고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

      적인 강점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에 의하여 남북
      으로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에서 강대국들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
      되자, 이에 대해
      한국 국민의 맹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뒤에
      좌파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함에 따라 극심한 정치적 혼

      란을 가져왔다. 한반도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처
      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미국은 마침내 신탁통치 실시를 전제로 한 단일
      정부 수립이라는 종래의 정책을 포기하고 일방적으
      로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제기하였다. 194

      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
      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정부가 수립된 뒤

      미·소양군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은 1948년 1월,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남북한총선거는 좌절되었다. 이

      에 유엔총회에서는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
      선거를 결의하여, 같은 해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선거
      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는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여 그해 9월 9일 조선민
      주주의인민 공화국을 선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2월 제3차유엔총회는 남한만을 유일·합법 정
      부로 승인하였으며, 이로써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
      으로 설정된 북위 38˚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긴장된 냉전체제의 경계선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북한은 소련의 지원에 따라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막

      강한 군사장비를 갖추었고 훈련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일성은 국외정세
      의 변화에 고취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6·25전쟁의 결정적인 요인은 먼저 국외적으로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1950년

      1월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시킨다>는 D.G.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고, 1949년 말부터 김일성이 소련의

      I.V. 스탈린에게 무력침공계획에 관한 지원을
      요청해오다가, 1950년 4월 <중국의 동의를 전제로 한>
      전쟁지원 약속을 받아냈고 5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의 지원약속을 얻어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 국내적 요인으로는 남조선노동당의
      실질적인 붕괴에 따라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공산당 내부의
      민족해방을 위한 경쟁에서 김일성이 박헌영(朴憲永)
      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남한이

      아직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병력·장비가 열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
      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침략계획을 은폐
      하기 위하여 남북 통일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
      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이때 남한은
      10만에 이르는 병력은 갖추었으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제주도사삼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등 공
      산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jang.h.s. 공기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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