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천주교회

[스크랩] 故김수환추기경 장례미사

공기돌 바오로 2009. 2. 1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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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

출생
1922년 5월 8일
사망
2009년 2월 16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직업
천주교인
학력
가톨릭대학교
경력
2003년 1월 생명21운동 홍보대사
2001년 5월 사이언스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수상
2002년 칠레정부 베르나르도 오히긴스십자훈장
2001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공로훈장 한.독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
위키백과
 
생애

유년시절과 학업

1922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5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김보현은 천주교를 믿다가 무진박해충청도 연산에서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집안이었다. 그의 부모는 8명의 자녀들이 전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형 김동한(가롤로)와 김수환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김수환의 나이 5살때 경상북도 군위군로 이주하였고 군위보통학교(지금의 군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하였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로 편입하여 계속 학업을 하였다. 1941년 4월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조치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독립투쟁에 더욱 관심을 갖게되었다.[출처 필요] 1944년 일본 학병으로 강제 징집 당하여[출처 필요]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조치 대학에 복학하여 1946년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하다가 1951년 9월 15일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사목생활

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상북도 안동성당(지금의 목성동 주교좌성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천주교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상북도 김천성당(지금의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러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현재 가톨릭신문)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1년 8개월을 활동하는 동안 김수환 신부는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한국 기독교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1966년 2월 15일, 44세의 김수환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써 아무것도 없었던 마산교구에 발판을 만들었다. 1967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하자, 1968년 4월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였다.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엉망이었으나 김수환 대주교는 혼란을 혁파하고 안정된 행정을 보여주었다.

추기경으로서의 사목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7세였고 당시 추기경중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조치 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 김수환 추기경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한다고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쓰여졌다. 특히 1980년대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되지만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사목위원회를 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재임기간 중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1]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를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에게 물려주었으나 많은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아직도 사회 곳곳에 그의 영향이 끼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도 명성이 높다.

 사망

2008년 7월부터,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강남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2008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는 등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으나, 기력을 회복했었다. [2] 2009년 2월 16일 오후부터 급격히 호흡 곤란과 혈압이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어 의료진이 응급 조치에 나섰지만, 결국 오후 6시 12분 경 강남성모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선종했다. 2008년 2월 16일 KBS뉴스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실천한 실천적 성직자이며[3], 개신교불교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였다고 보도하였다.[4]

출처 : 이유 있는 침묵
글쓴이 : silen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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