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천주교회

성 탄 제.

공기돌 바오로 2019. 12. 11. 13:56

 

성 탄 제

 

- 김종길 -


어두운 방안엔
빨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 茱 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성탄제>(1969)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서른 살 중년 사내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성탄절을 배경으 로 하고 있지만, 성탄제의 상징인 '사랑'의 의미만 차용하고 있을 뿐 실상은 한국의 전통적 복고적인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다.

이 시는 열 개의 연이 시간적 추이 과정에 따라 전개되고 있으며, 1∼6연의 유년 시절의 체 험과 7∼10연의 어른이 된 화자의 체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도 4연과 6연은 그 시간적 전개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산수유 열매'와 '눈'을 대 비시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 도에서 비롯된 고도의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붉은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통해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어른으로서의 화자는 이제 어린 시절에 앓던 열병이 아니라 열병을 앓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린 시절 화자의 가슴에 서려 있던 열병이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이 대신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열병과 그리움이 대칭적 관계를 갖게 된다. 또한,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은 '엄부 자모(嚴父慈母)'로 대변되는

유교적 전통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차가운 옷자락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깊고 뜨거움을 상징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전반부의 시적 공간은 시골이며, 후반부의 공간은 도시이다. 시골의 방에는 '바알간 숯불'이 피어 있고,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도 역시 '눈'이 내리고 있지만, 방이 제시되지 않는 대신 '내 혈액'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나타나 있다. '내 혈액'과 '숯불'은 동일한 붉은빛 으로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지며 시의 깊이를 더해 줌은 물론, 이러한 공간 구조는 '산수유 붉은 열매'에 의해 내적 통일성을 얻게 된다.

이 시의 시간은 전·후반부 모두 '성탄제 가까운 밤'이다. 성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이지만, 여기서는 성탄제의 그런 피상적 의미를 벗어나 화자와 아버지의 새로운 만남을 촉진시키고 조명하는 기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성탄제는 서구의 화려하고 시끌벅 적한 축제로서의 의미가 아닌, 한국의 전통적·복고적 정서로 전이되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 랑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한편, 그 분위기에 싸여 가족간의 사랑을 한 차원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부자자효(父慈子孝)의 윤리관으로 대표되는 관습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한 차원 더 깊어진 애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눈'은 고요한 회상의 분위기와 함께 춥고 쓸 쓸한 겨울 장면을 조성하는 기능을 갖는다. 또한, 그 눈을 헤치고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 열매'가 화자의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는 것은 육친간의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사랑이 늘 존

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수유 붉은 알알'은 화자의 내부에 생명의 원소처럼 살 아 있는 사랑의 상징이 됨으로써 거룩한 '성탄제'의 본질적 의미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BGM: 피아노연주/ 송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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