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6.25 남침

공기돌 바오로 2012. 6. 17. 20:03

      6.25 사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군이 불법 남침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 6·25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

      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
      를 고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

      적인 강점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에 의하여 남북
      으로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에서 강대국들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
      되자, 이에 대해
      한국 국민의 맹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뒤에
      좌파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함에 따라 극심한 정치적 혼

      란을 가져왔다. 한반도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처
      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미국은 마침내 신탁통치 실시를 전제로 한 단일
      정부 수립이라는 종래의 정책을 포기하고 일방적으
      로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제기하였다. 194

      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
      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정부가 수립된 뒤

      미·소양군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은 1948년 1월,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남북한총선거는 좌절되었다. 이

      에 유엔총회에서는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
      선거를 결의하여, 같은 해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선거
      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는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여 그해 9월 9일 조선민
      주주의인민 공화국을 선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2월 제3차유엔총회는 남한만을 유일·합법 정
      부로 승인하였으며, 이로써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
      으로 설정된 북위 38˚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긴장된 냉전체제의 경계선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북한은 소련의 지원에 따라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막

      강한 군사장비를 갖추었고 훈련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일성은 국외정세
      의 변화에 고취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6·25전쟁의 결정적인 요인은 먼저 국외적으로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1950년

      1월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시킨다>는 D.G.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고, 1949년 말부터 김일성이 소련의

      I.V. 스탈린에게 무력침공계획에 관한 지원을
      요청해오다가, 1950년 4월 <중국의 동의를 전제로 한>
      전쟁지원 약속을 받아냈고 5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의 지원약속을 얻어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 국내적 요인으로는 남조선노동당의
      실질적인 붕괴에 따라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공산당 내부의
      민족해방을 위한 경쟁에서 김일성이 박헌영(朴憲永)
      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남한이

      아직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병력·장비가 열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
      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침략계획을 은폐
      하기 위하여 남북 통일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
      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이때 남한은
      10만에 이르는 병력은 갖추었으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제주도사삼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등 공
      산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jang.h.s. 공기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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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 못할북한 남침 6. 25. 전화(戰禍)들 입니다.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 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 하고 가시리잇고”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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