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李舜臣, 李承晩, 朴正熙

공기돌 바오로 2012. 3. 8. 22:33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분들.李舜臣, 李承晩, 朴正熙
★ 李舜臣, 李承晩, 朴正熙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경제를 먹고 사는 중이다.』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박정희 시대의 성공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오늘의 풍요?? 여유를

만들 수 없었다.

그것으로 해서 이룰 수 있었던 근대국가의 면모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걸핏하면 그것을 내세우는 것으로 노벨상도 타고

온갖 재화를 자기 금고에 쌓아놓고 명문 私學(사학)에 기념관을 짓고

지방도시에 컨벤션센터를 짓고 온갖 명예와 부귀를 누리는

이른바「민주화의 주역」으로서의 무대 생활을 한껏 누리는

前職(전직) 대통령의「만고의 호강」도

박정희 경제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궁정동 사건으로 박정희 시대를 끝내고도 몇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북유럽을 여행했을 때 그 곳 언론인 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외신 담당 부국장을 한다는 그는

한국에 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후진국으로 출발한 나라 중에는 군사 쿠데타를 겪은 나라가 많다.

그런 나라들은 하나같이 정치 혼란을 겪고

경제는 정체되고 마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쿠데타 주역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박정희 라는 사람의 덕이다.

 

그는 부정부패로 혁명의 말로를 그르치지 않은,

세계사에서 몇 안 되는 군인 출신 지도자다.

 

 

그래서 한국은 저개발국을 벗어났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지반을 쌓았다.

거의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런 말을 그 언론인은 했다.

 

 

 

 

 

<그는 부정부패로 혁명의 末路(말로) 그르치지 않은,

세계사에서 몇 안 되는 군인 출신 지도자다.>

<그도 생전에는 부정축재 의혹도 샀었고 무엇보다도

민주화를 막은 독재의 혹독함이 비판을 샀으며

특히 시해 당할 당시 청와대 안에서 나온 수억 원에 이르는

현금 가방이 화제가 되었던 일도 있다.

그만한 액수면 부정의 의심도 받을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는 말을 그 언론인에게 반론 삼아 나는 해보았다.

 

 

그러자 그는 조금 냉소에 가까운 미소를 짓더니

『보통 나라를 다스리는 특히 군사 쿠데타 같은 것을 치른 주역이

챙기는 부정축재의 규모란 그런 정도가 아니다.

 

박정희 떠난 이후 그가 스위스 은행에 숨겨 놓은 재산이 있다든지

국유재산을 송두리째 챙겨서 私有(사유)화한 내용이

드러났다든지 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는 부정축재의 혐의를 조금도 받지 않는,

세계사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

라고 말했다.



그 이후 몇 몇 사람의 전직 대통령들이 일으킨 통치자금 은닉 소동을 보며

그 외국 언론인이 한 말이 노상 기억나곤 했다.

 

 

그 언론인은 내가 어설프게 제기한

『박정희 시대의 유보된 민주화』의 공과에 대해서도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경제적 生存力(생존력)이 없는 사회의 민주화란

허망한 구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겪은 시대에 대한 유치하고 부실한 나의 인식이 부끄러웠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다는「7가지 惡德(악덕)」이 있다.

 

 

1. 철학 없는 정치

2. 도덕 없는 경제

3. 노동 없는 富(부)

4. 인격 없는 교육

5. 인간성 없는 과학

6. 윤리 없는 쾌락

7. 헌신 없는 종교.

 

 

 

6번과 7번은 개인적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라는 지도자는 적어도 이중 5가지의 악덕은

저지르지 않은 통치자였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그를 보낸 것은 救援(구원)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를 기리는 이런저런 모임이 자발적으로 생겨나서

꾸준히 이어간다.

 

오늘처럼 左派(좌파)들의 악랄한 발악에 시달리는 세태를 보며

위안과 희망을 찾다가 생각해낸 일인 것 같다.

역사를 통해 이런 분들을 하늘이 보내준 것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

어떤 섭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고, 舜臣(순신)이 살아 있습니다.』

어떤 문학보다 비장하고 아름답다.

 

 

러.일 전쟁의 海戰(해전)에서 거대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쳐부수고 승전을 이끈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라는 일본의 해군장수가 있다.

 

 

연합함대를 이끌고 그가 승전을 했을 때 그를 치하하며

『장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이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해전의 영웅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도고 제독은 이런 내용의 대답을 한다.

 

 

『나를 넬슨 제독과 견주는 말은 혹여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가히 軍神(군신)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거기에 어떻게 이 사람을 견주겠는가?』라고.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맞아 물리치는 일은

일본 해군으로서는 일본국의 멸망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해군력으로 비교할 때

열 배도 넘는 배와 군사력을 러시아는 지니고 있었고

그 해군이 어마어마한 대열을 조직하여

여순 앞바다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 러시아 해군을 살려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내면

일본과 전투는 끝장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패전은 기정 자실이다.

단 한 척의 군함도 살아서 일본 앞 바다를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전 일본열도가 生死(생사)의 결전을 기다리며

러시아 함대가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드디어 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한 일본 함대 사관은

출전을 앞두고 무릎 꿇고 간절한 기도를 한다.

그리고 나서 말한다..

 

 

『나는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조선의 軍神(군신) 이순신 장군에게 빌었노라!』

 

나는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조선의 군신 이순신 장군에게 빌었노라』고.

 

 

결의에 차서 자신의 武運(무운)을 지켜달라고 빈 대상이

이순신 장군이었음을 말하고 출전한 것이다.

 

 

그 해전에서 기적처럼 일본은 이겼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에게 빈 그 사관은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이

돌봐 주시어서 승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얼마나 위대했으면 그 분 때문에 혼 줄이 난

일본의 후예들이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되었겠는가.

 

 

이순신 장군은 우리민족을 지키기 위해

하늘이 보낸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승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

태어날 수 있었던 절체절명의 民族運(민족운)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바로 그가 미국 쪽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기회를 갖지 않았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지도자의 역량 중에서

특히 나라를 잃고 식민지 처지에 떨어져버린 조국을 건져

근대국가로 만들어가는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역량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시대를 보는 통찰력이다.

 

그리고 구국의 열정과 그것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이승만은 바로 그 때!

그런 능력을 가지고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의 신이

의지를 갖고 바로 그때 보낸 인물이 이승만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김일성 부자가 이끄는 죽음의 공화국에

우리는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 그들이고

그래서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은 60년 동안 이를 갈며,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되었던 나라처럼 만들려고

갖은 음모를 꾸미고 아직도 그것을 진행 시키고 있다.

 

 

이승만만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 같은 것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절치부심하며 원통해 하는 세력이

여전히 「촛불정국」에 얹혀

이 나라를 어떻게 해보려는 모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왜 오늘의 행사에는 「승만 리」의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가.

나는 그것이 좀 이해할 수가 없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의 날」행사를 함께 진행했던

젊은 교수 한 사람이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이 날을 주도한 한국인 교수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아서

이 행사는「민주화」이후의

한국을 중점적으로 소개한 행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노신사가 참가했다가 행사를 마칠 무렵

젊은 교수를 붙들고 질문을 하더라고 한다.

 

 

그는 우선 자기를 소개하면서

젊어서 현역 시절에는 상공에 종사했었노라고 했다.

그가 젊은 시절 그러니까 50년대의 어느 시기에

미국 각 연방을 대표하는 상공인들로 구성된 경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의 초청을 받고 투자를 타진하기 위한 방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미국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대대적인 기획을 하여 초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일본에 들렀는데

어떤 연고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주 간곡하게 일본의 일정을 마치면

한국에도 한 번 들러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는 것이다.

 

본래의 일정에도 없었거니와 한국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거의 백지 상태여서 전혀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지만

하루나 이틀만 연장하면 들를 수 있다는 이 요청이 하도 집요해서

마침내 한국에도 걸음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온 한국에서 「승만 리」를 만났고

그가 하는 훌륭한 영어의 투자 유치가

어찌나 열정적이고 애국적이고 진지한지

당시에 함께 온 미국 상공인 전원이 반해 버렸다.

 

그래서 정작 일본에서 별로 성과가 없었던 투자 약속이

한국에서 거의 전원이 한 건씩 성사를 시키는 성과를 내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 이후 자기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평생 이어 왔고

특히「승만 리」에 대해서는 후진국 정치지도자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지도자임을 확신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대학에서 갖는다는

「한국의 날」행사를 일부러 찾아 왔는데

왜 오늘의 행사에서는「승만 리」의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 것이냐.

나는 그것이 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노신사의 질문을 받고

40대의 젊은 한국인 교수는 무안하고 부끄러워

어물어물 변명하고 피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이 건국의 지도자를 보내준 神은

오늘의 이 땅을 응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나 않을까?>

 

 

이 승만을 독재의 화신처럼 몰아서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세력에 의해서 너무 폄하 당하는,

이 건국의 지도자를 보내준 신은

오늘의 이 땅을 응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나 않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는 청렴한 거인이었다.

 

파란 눈의 부인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돈을 감춰 두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도

그의 재임 시절에 악의적으로 퍼져 있었지만,

그는 정말 개인적으로 아무 치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대가 끝난 뒤에 다 드러났다.

 

 

남편이 세운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며 객지를 떠돌다가

노년에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고 들어온 리넨 속옷이 이화장 기념관에는 전시되어 있다.

 

 

우리네 옛 여인들이 입었던 속곳과 너무도 흡사한 이 속옷에는

겉에다 손수건 만하게 덧대어 붙인 주머니가 있다.

 

 

이 주머니에 그는 한국에 돌아오면 반드시 하고 싶었던

틀니를 만들 비용을 꽁꽁 접어 넣고 들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도 훌륭하고 값은 싼 한국의 치과기술』의 혜택을 보았다.

 

의치를 해 넣고 나서 너무도 마음에 들어 한 그는

외국인 친지들이나 외교가의 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권고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치과 시술을 반드시 받으시도록 하라.

당신에게 크게 이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양자인 아들 내외에게 그분은 꼭 한 가지 당부를 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내게 저 의치를 반드시 끼워 달라.

그래야 저승에 가서 아버님을 만났을 때

보여드리고 자랑을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종을 보아주는 병원에서도 난감해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당부만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손자들의 양말을 기워서 신겨 가며 검소한 삶을 유훈으로 남긴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야기를

그의 며느님은 지금도 눈물을 흘려가며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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