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경복궁의 역사와 수난.

공기돌 바오로 2009. 4. 14. 22:14
: 1   날짜 : 2007.01.15 13:56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 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 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 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 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 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복궁< 景福宮 >은 조선시대< 朝鮮時代 > 의 정궁< 正宮 >으로 태조< 太祖 >이성계< 李成桂 >가 1392년 조선 < 朝鮮 >을 건국< 建國 >한 다음 즉위< 卽位 >3년에 한양< 漢陽 > 도읍< 都邑 >을 정하고 세운 궁궐< 宮闕 >이다. 경복궁< 景福宮 >이라는 이름은 당시 판삼사사< 判三司事 >인 정도전< 鄭道傳 >이 시경< 詩經 > 에 나오는 군자< 君子 >의 만년< 萬年 >빛나는 복< 福 >을 빈다는 뜻이 담긴 경복< 景福 >이라는 시구를 따서 지은 것이다. 후세< 後世 >에 건물< 建物 >이 증축< 增築 >되어 정궁으로서의 웅장< 雄壯 > 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궁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의 병화 < 兵禍 >로 전소< 全燒 >된 이후 273년 후인 고종< 高宗 >2년(1865)에 착수< 着手 >하여 4년 만인 고종 5년(1868)에 창건< 創建 >당시< 當時 > 의 규모< 規模 >로 재건< 再建 >하였다. 1910년 일제< 日帝 >에 의해 국권< 國權 >이 강탈< 强奪 >당하자 200여 동< 棟 >에 달하던 전각< 殿閣 > 은 거의 헐리고 경회루 <慶會樓 >근정전 <勤政殿 >등 10여 동만이 남았고 근정전 남쪽 정면< 正面 >에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 청사< 廳舍 >를 지음으로써 경복궁의 경관< 景觀 >은 완전히 그 모습과 위엄< 威嚴 >을 잃고 말았다. 경복궁의 경내< 境內 >는 150,000평으로 네모 반듯한 터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는 북한산< 北漢山 >줄기인 북악산< 北岳山 >을 중심< 中心 >으로 좌우에 낙산< 駱山 >과 인왕산< 仁旺山 >이 경복궁 터를 감싸주고 있다. 궁궐에는 북악산에서 발원< 發源 >한 명당수< 明堂水 >가 영제교 <永濟橋 > 를 지나 청계천< 淸溪川 >과 한강< 漢江 >으로 흐르도록 했고, 남쪽은 남산< 南山 >과 관악산< 冠岳山 >을 마주한 명당< 明堂 >터< 址 >이다. 경복궁의 담장은 남쪽으로는 정문< 正門 >인 광화문< 光化門 >, 동쪽에는 건춘문< 建春門 >, 서쪽에는 영추문< 迎秋門 >, 북쪽에는 신무문 < 神武門 >이 있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건춘문의 북쪽(현재 < 現在 >의 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정문)으로 옮겼는데 1950년의 한국전쟁< 韓國戰爭 >당시 문루< 門樓 >가 타버리고 석축< 石築 >만 남아 있던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 位置 >로 재건< 再建 >하였다. 공기돌 옮김. >
JANG.H.S. 공기돌.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금강산.  (0) 2009.12.23
史跡 巡禮 (1)  (0) 2009.10.06
[스크랩] 5000년 歷史를 움직인 10人의 大한국인  (0) 2009.08.01
1900년대 사진들  (0) 2009.01.27
[스크랩] 백년전 한국 사진작가. 호주.조지로스  (0) 2006.10.12